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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래는 이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敎化)하느니라.----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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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화경(法華經) 방편품(方便品)-1-02-01
 
불교의 방편(方便) 진실(眞實)전제(前提)합니다. 인간이 태어난다는 그 자체가 * 절대의 진리 분상에서 하나의 방편입니다. 영원한 대생명 분상에서 낳고 늙고 병들어 죽는 생로병사(生老病死) 그 자체가 제법의 실상(實相) *십여시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생명의 드라마입니다.
3천여년 전, 사바세계에 *일대사인연으로 오신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대우주 본체 본불을 드러내기 위해 *개현법 방법론을 선택하셨습니다. 금생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이름으로 오셔서 50년간 중생을 교화하시는 동안 아함경을 비롯한 42년 방편설은, 부처님성수(聖壽) 72세부터 열반에 드시는 80세까지 8년간 설하신 진실설 법화경을 전제한 인프라,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일체중생구제론이 전제된 法華經 관점(觀點)에서 *구원실성(久遠實成) 본불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체를 드러내기 위한 개현법(開顯法) 방법론으로 法華經 28품을 둘로 나누었습니다. 앞의 절반 14품적문(迹門) 法華經이라 하고, 뒤의 절반 14품본문(本門) 法華經이라고 합니다.
*적문(迹門)이란, 적불(迹佛)의 가르치심이라는 뜻이고, *본문(本門)이란, 본불(本佛)의 가르치심이라는 뜻입니다.
(迹)은 <자취>입니다. 일월만영(一月萬影)입니다. 허공뜬 달하나이지만, 강마다 물마다 달그림자가 있습니다. 그와같이 한 분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중생의 근기따라 가지가지의 형상과  눈높이로  설하신 법문이 8 만4 천 법문입니다.
적문 法華經의 기둥 *방편품금생불(今生佛) 석가모니 부처님신분으로 설하셨으며, 본문 法華經의 중심인* 여래수량품일체중생구제를 전제한 구원실성 본불 석가세존의 신분으로 부처님의 정체를 설하신 대생명체 실상(實相)입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왕사성 설산수행 6년과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단좌명상 6년을 통해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하신 것으로 만족하고, 50년간 가르치심을 설하지 않고 *열반에 드셨다면 뒤를 이어오는 모든 중생은 부처님이라는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구제 관점에서 42년 방편의 교(敎)와, 8년 진실의 교(敎)로 부처님의 참마음을 금생오신 증표로 남기셨습니다. 물론 *불사리(佛舍利)로 금생에 오신 증표를 남기셨지만, 일체중생구제가 전제된 法華經을 남기신 그 자체가 전인류의 *구원이며 영원한 생명 당체(當體)증표입니다.
그런 뜻에서 부처님의 정체를 밝히신 본문 法華經 여래수량품적문 法華經의 기둥 *법화경 방편품 제 2를 열어서 적문 법화경본문 법화경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고 통합(統合)<큰 하나>임을 말씀드립니다. 적문법화경 방편품 제 2본문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을 전제하고 여신 생명의 금자탑(金字塔)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의 발로입니다.
 
*법화경 방편품 제 2 첫머리에,----그 때 세존께서 *삼매(三昧)로부터 안상(安詳)히 일어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이르시되, 모든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느니라.(諸佛智慧=제불지혜 甚深無量=심심무) . ---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이란,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인생의 의의(意義)를 완전히 깨달아 부처님 반열에 오르면 불지(佛智)를 갖추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권능을 갖추셨다는 그런 뜻입니다.
<지혜>란, <지혜지(智), 지혜혜(慧)>자의 복합어입니다. (智) 유(有), 차별(差別) 차이(差異)면(面)을 자세히 보는 힘이요, (慧) 공(空), 평등(平等)면(面)을 자세히 보는 힘입니다.
불교 용어 알기 쉽게 모아 놓은 대승의장(大乘義章)에서는, 지혜라는 것은 <비추어 봄(智)>라 하고, <풀어 봄(慧)>라고 하였습니다. <비추어 본다>는 것은 하나하나 대조(對照)하는 것입니다. 비교(比較)하여 낱낱의 차별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지구상에는 수십억의 인간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굴이 똑같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사람마다의 차이점을 아는 것이 (智), 곧 <비추어 본다>는 것입니다. <풀어 본다>는 것은 대체(大體)를 파악(把握)하는 것입니다. 다르다고 하는 차별 가운데서도 모든 것에 통하는 평등한 것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다르다면 모두가 다 다르지마는 그 다른 것을 통틀어 보면 거기에 다르지 않고 일관(一貫)공통 분모가 있습니다. 그 일관된 것공(空)이라 합니다. 또는 평등(平等)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을 불교에서는 혜(慧)라고 합니다. 모든 것들은 낱낱이 다르므로 그 다른 점을 하나하나 자세히 분별하는 것도 필요하지마는 또한 그 다른 것에 구애(拘碍)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것들 가운데 일관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 분명히 있음을 확고하게 포착(捕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별평등,  지(智)혜(慧)를 합해서 *지혜(智慧)라고 합니다. 차별쪽만 보고 있으면 인간은 항상 마음이 바빠서, 오직 그날 그날에 쫓기듯이 허무한 기분이 듭니다. 반면에 평등쪽만 보고 있으면 현재의 삶이 무의미하게 생각되어 소위 공리(空理)  공론(空論)에 치우쳐 하는 일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양쪽, 차별평등을 다 보고 살피어 영원성을 찾으라는 것이 이른 바 삼원론(三元論)이라고 하는 지혜입니다. *부처님의 지혜 그와 같이 <(智)(慧)> 양쪽을 다 포용(包容)해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므로, <부처님의 지혜는 심히 깊고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의 문은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움이니,(其智慧門=기지혜문 難解難入=난해난입) 일체의 * 성문벽지불이 능히 알지 못하느니라---
 
<지혜의 문>이란, 부처님의 지혜(佛智)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범부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불지(佛智)를 맞바로 가르쳐 주어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눈높이에 맞추어 *사실단 방법론으로 설하시면서 차차 깊은 데로 인도하여 마침내 불지(佛智)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대정각(大正覺者) 부처님 분상에서 상대의 근기 따라 설하시는 것을 우리들 중생쪽에서는 알 수 없으므로, <지혜의 문>을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눈높이 따라 알맞는 가르치심(敎)을 설하시지만, 듣는 편에서는 무슨 목적으로 그러한 교(敎)를 베풀어 주시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믿고 수행하면 알 수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 *신해(信解)<지혜의 문>에 들어가는 빗장입니다. <안다이해한다>는 것은 믿음이 따르는 것을 전제합니다. 가르치심을 믿고 정성을 다해서 몸으로 실행하여 체율체득(體律體得)해야만 비로소 그 참된 뜻을 알 게 됩니다. (信)(解)가 수반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法華經 난해난입(難解難入)이라 합니다. 그러나 계속 경전을 읽고외우고실행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처님의 힘이, 지력(智力)이 자기의 마음에 스며들고 미혹(迷惑)하지만 <고맙다존귀하다>는 기분이 되고, 그렇게 되면 그 존귀하다는 기분에 의해 구원 받아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일을 차차 알 게 되며 조금씩 <지혜의 문>에 들게 됩니다.
<성문벽지불>이란, 세상 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세상에 얽매이지 않게 되었더라도, 자기 혼자만의 것으로 그친다거나, 이치만 따지고 있어서는 부처님의 지혜를 얻기가 힘들기 때문에, 실제로 실행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승(二乘)은 불교의 목적지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일승(一乘), 불지(佛智)목적지입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부처님은 일찍이 백천만억(百千萬億)의 수없는 모든 부처님을 친근(親近)하시여 모든 부처님의 한량 없는 도법(道法)을 다 행하시고  circle03_darkgreen.gif 용맹정진(勇猛精進)하시여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느니라. ---
 
---어느 부처님이나 다 일찍이 백천만억의 한없이 많은 모든 부처님께 친근(親近)하셔서 가르쳐주신 바를 믿고 실행해서 깨달으셨다. 전력투구(全力投球)하여야 부처님이 된다.----
 
<다 행한다(盡)>란, 조금도 힘을 늦추지 않는 것입니다. 범부는 경전을 읽거나 *<묘법연화경> 제목봉창((題目奉唱)하는 것도, 범부는 일념으로 모셔지지 않습니다. 일념으로 모시는 것 같지마는 다른 마음이 섞여 있습니다.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열심히 경전을 읽는다면 다른 일은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마는, 범부는 무슨 소리가 들리면 찰나에 마음이 흩어집니다. 경전을 읽는 것도 아니요, 제목을 외우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산란하면 별로 공덕이 없습니다. 흔히 -나는 3년을 法華經을 신심했지마는 조금도 공덕이 없다.--하고 다른 경전에 매달린다거나 타종교로 옮겨가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입니다. 온 마음을 쏟아 넣지 않으면 공덕이 없습니다. 전력을 기울여서 필히 실행하는 것입니다.
 circle03_darkgreen.gif <용맹정진(勇猛精進)>에서 용맹(勇猛)은 마음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정진(精進)은 딴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수(純粹)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정진에서 <정령정(精)>자는 잡념이 섞이지 않는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해타산(利害打算)이나ㆍ남에게 보이고 싶다거나ㆍ남에게 알리고 싶다거나ㆍ하는 생각이 섞여 있는 마음은 결국 자기의 신심(信心)을 무디게 합니다.  딴 생각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용맹정진, 이해득실(利害得失)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오종법사를 수행한 *과보로 부처님이 됩니다.
 
----심히 깊고도 깊은 *미증유(未曾有)의 법을 성취(成就)하시여 *근기(根機)를 따라 설하시는 뜻은 알기 어려움이니라. --
 
-- 처음부터 심히 깊고 깊은 *일불승 법화을 설하시면 *무명한 중생은 근기 따라 설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알기 어려움이니라>, 부처님께서는 대우주의 진리를 체득하신 후, 상대의 근기따라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어디에 목적을 두시고 가르치심을 설하시는가에 대해서는 부처님 이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중생이 생각하는 방편은 자기 개인의 이익위한 것으로 허위로 끝나지만, 부처님께서 쓰시는 방편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대자대비심입니다. 일불승 法華經 관점에서 개인의 욕망이 전제된 범부의 방편과, *일체중생구제론이 전제된 부처님의 방편은 근본적으로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을 중생은 알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리불아, 내가 성불한 이래 가지가지의 인연과 가지가지의 비유로 널리 법을 설하며, 수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든 착상을 여의게 하노라.----
 
-- 사리불아, 내가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서 성불(成佛)한 이래, 여러 가지의 인연비유로써 모든 언교(言敎-)를 무수한 방편, *삼주설법으로 연설(演說)해서 중생을 일불승 법화경으로 인도하였다. ----
 
<인연(因緣)>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드러내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일을 끌어내어서 설명하는 것을 가지가지의 인연이라 합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이치적으로만 하시면 중생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이러이러한 일이 있었고누가 이러한 말을 했고누가 이러한 행동을 했다-- 하는 여러 가지 사실을 들어서 설하는 것이 인연설입니다. 언교(言敎)는 입으로 말하는 가르치심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가르치심에 가까이 들어오지 못하므로 우선 말씀으로 가르치심을 쏟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인도(引導)>란, 끌어내어서 이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끌어낸다는 것은 중생을 *견사(見思)의 미혹에서 끌어내는 것이요, 이끌어 들인다는 것은 중생을 * 사오계로 이끄는 이 두 가지를 합쳐서 인도라고 합니다. 비유하면, 방이 둘이 있는데. 한쪽 방은 밝고 한쪽 방은 어둡습니다. 그 어두운 방에 있는 사람을 데리고 나와서 밝은 방으로 들여보냅니다. 그와 같이 어두운 데서 끌어내어 밝은 데로 이끌어 들이는 것이 인도(引導)입니다.  인도는 인간을 교화하는 것 곧  교(敎)를 주는 것입니다. 중생은 모두 미혹(迷惑)하기 때문에 그 迷惑한 인간을 迷惑속에서 끌어내서 깨달음 쪽으로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도 인도 받아야 하고, 아울러 다른 사람도 인도하라는 것이 불교의 영원한 생명 *보살도입니다.
<착상>이란, * 집착(執著) 또는 애착(愛著)과 같이 자기를 중심해서 사물을 생각하고 남의 입장은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고 꺾어다가 자기 집 꽃병에 꽂고 자기 혼자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런 마음이 착(著)이라는 것입니다. (著) 탐냄아까워함(惜)- 두 가지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남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고 싶다ㆍ자기 것은 남에게 주고 싶지 않다ㆍ하게 되는 것입니다.-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먹는다-는 말은 탐내는 것을 극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모든 일에 탐냄과 아까워 하는 것이 (著)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착(著)을 떠나게 하고자 모든 중생을 *견사의 미혹에서 끌어내어 깨달음의 경지, *사오계로 인도하려고 갖가지 방편을 쓰신 것이 <착상을 여의게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여래(如來)는 방편(方便)   circle03_darkgreen.gif 지견(知見)바라밀을 이미 다 구족함이라.--
 
---부처님께서는 방편(方便)으로 일체의 인간을 가르쳐 인도하는 길을 다 알고 계신다.---
 
<바라밀>이라는 것은 범어입니다. 번역하면 도(渡), 건넨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강이 있으면 이편 언덕과 저편 언덕이 있습니다. 저편 언덕 피안(彼岸)은 깨달은 사람, 이편 언덕 차안(此岸)迷惑한 사람입니다. 저편성인(聖人)이편범부(凡夫)입니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범부의 迷惑한 경계에서 성인의 깨달은 경계로 가는 것입니다. 강을 건너야 하는 데, 그 강을 건너가는 방법이 (渡)입니다. 迷惑한 경계를 떠나서 깨달은 경계에 이르는 가지가지의 수단 방법을 모두 (渡)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어느 것이나 모두 부처님의 교(敎)에 의지하여 실행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지견(知見)바라밀을 이미 다 구족함이라>--이 말씀은 부처님을 몹시 칭찬하는 말씀인데, 실은 후일 <너희들도 그렇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을 절반만 읽어서는 안됩니다. 앞 대목만 읽어보면 어쩐지 범부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경전 곳곳에서 -부처님이란 무한히 뛰어나신 분이다너희들과는 아주 거리가 먼 분이다.- 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너희들 범부도 수행을 쌓으면 부처님과 같이 될 것이니까 발분(發奮)해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경전을 절반만 읽고 비판하기 보다는 끝까지 읽어보고 전체를 통합시켜야 합니다. 부처님의 50년 설법 가운데서 42년 방편설만 읽어서는 부처님의 참마음을 모릅니다. 42년 방편설로 지혜제일이라고 칭찬받는 *사리불존자까지도,-- 어째서 석가여래께서는 모든 부처님은 훌륭하다고 말씀하시는가ㆍ도대체 어찌된 까닭일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리불존자가 그러한 생각을 할 것을 이미 아시고, <내가 모든 부처님을 칭찬하는 것은 범부를 위하는 것이다. 실은 너희들을 말하는 것이다, 너희 범부들도 수행하면 지금까지 내가 칭찬한 그러한 모든 부처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너희들은 끊임없이 수행하라>고 모든 부처님의 덕(德)을 칭송하시면서, <한량없는 과거세 백천만억 나유타겁>성불하신, *구원실성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정체를 밝히는 * 법화경 여래수량품 제 16까지 인도(引導)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방편품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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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ffeecup_skyblue.gif         circle03_darkgreen.gif 지견(知見)바라밀
 
지견 바라밀이라는 것은, 바라밀, 도(渡)의 한 가지입니다. 지견(知見)이란, 모든 사물의 참된 성질을 구명(究明)해서 아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물을 볼 때는 <①  (空) ②  (假) ③  (中)>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空)이란 평등입니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어리석은 사람ㆍ영리한 사람ㆍ착한 사람ㆍ악한 사람으로 차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쌓으면 누구나 부처님이 되는 점은 같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물의 평등면을 잘 파악하는 것이 (空),  평등관(平等觀)입니다. (空)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그치면 잘못입니다. -제법개공(諸法皆空) 또는 색즉시공(色卽是空)-에서 (空)을 <아무 것도 없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반쪽만 보는 것입니다.
 
(假)란 차별입니다.사물이 같다고 하지마는, 아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거기에 다른 점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사람의 얼굴이라는 점에서는 다 같지마는 똑같은 얼굴은 없습니다. 이 다른 점을 명확하게 알아보는 것이 (假)입니다. 차별관(差別觀)입니다. 만약 차별을 모르고 평등에만 얽매이면 그것은 큰 잘못이라고 하여 circle03_darkgreen.gif 전교대사 악평등(惡平等)이라고 하였으며, 반대로 평등의 방면은 조금도 보지 않고, 다만 차별의 방면만 보는 것을 악차별(惡差別)이라고 하여 어느 것이나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재산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ㆍ지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ㆍ신분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ㆍ모두 다릅니다. 이 다른 점만 생각하고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성을 전혀 보지 않는 것은 잘못이며 악차별입니다.
악차별을 하면 세상은 항상 투쟁이 끊일 날이 없습니다. 평등면차별면을 다 아울러 보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여러 자식을 다같이 평등하게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이나 형편에 따라 대우 방법에 차별을 두며 사랑합니다. 차별 있는 대우 방법은 평등한 애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식을 차별있는 대우를 하지 않고 똑같이 하면 어느 자식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구제를 전제하고 상대에 따라 각각 알맞는 방법으로 다르게 가르치신 것이 8만4천 법문입니다.
차별 없는 평등한 *자비(慈悲)는 있을 수 없습니다. 평등에만 기울어지면 그것은 악평등, 곧 우리 사회의 평준화 교육 일변도로 학교와 학원이 세다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별에만 기울어지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空)이라고 하는 평등관으로써 모든 것을 근본으로부터 관찰하고, 그리고 (假)라고 하는 차별관을 생각하고 그런 다음에, 이것을 종합하는 통일관으로 시너지(synergy)를 일구어 내어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中)이란 종합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생명 통일관(統一觀)입니다. <차별 없는 평등한 것에서 여러 가지의 차별이 생겨난다>, 또 <여러 가지 다른 가운데를 통해 보면 다르지 않은 것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를 종합해서 생각하는 것이 이른 바 (中)입니다. 다른 것은 다르다고 확고하게 구명하고, 다르지 않은 성질의 것은 다르지 않은 점을 확고하게 구명하여 이것을 통일하고 종합하면 미래지향(未來指向)*중도(中道)가 세워집다. 조화와 화합의 삼원론(三元論) 인생관으로 국가관으로 일체중생구제가 대전제된  거룩한 장도에 승차 곧 선택하는 것이 통일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인간에 대해 다같이 사랑하여 일체중생구제를 서원하시지마는, 인간의 수준이나 정도에 따라서 각기 적당한 를 설해주십니다. 그것이 * 방편입니다. 방편으로써 *일불승 법화경으로 인도하고, 필경에는 모든 인간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사물을 보는 힘, *삼체삼관이라고 하는 <(空)(假) (中)> 이 세 가지를 구명하며 사물을 보는 방법에 그릇 됨이 없는 것을 지견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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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ea.gif     잠깐 !        circle03_darkgreen.gif 전교대사(傳敎大師=最澄)
 
전교대사 6세기경 일본의 성덕태자(聖德太子)法華經 신앙을 널리 포교한지 200 여년이 지나서 등장하여 *법화행자로서 일본의 천태종을 개산한 종조(宗祖)입니다. 804년, 전교대사중국 천태종*묘락대사의 제자 도수(道邃)를 찾아가 2년간 法華經과   천태대사의 천태학을 공부하고 돌아와서 806년에 천태종을 개산하였습니다. 일본의 천태종은 중국의 천태종을 전교대사(傳敎大師=最澄=767-822)가 이어 받아 맥(脈)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